• 72년만에 경평축구(서울-평양) 부활
  • 8월 11일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남북 노동자 축구 경기 열려
  • 1933년 경평축구 참가 선수들
    <1933년 경평축구 참가 선수들>

    중단되었던 “경평축구대회”가 열린다.

    오는 8월 11일 토요일 오후 4시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는 1946년 중단되었던 경평축구대회가 72년 만에 열린다.

    경평축구, 즉 경평전은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단합과 극일의 저항정신을 키운 본보기로 당시엔 '팀' 대신 군(軍)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전경성군 대 전평양군 축구대항전이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경성군은 당시 축구의 명문 경신중학 중심으로, 평양군은 일본의 최강팀인 와세다 대학을 7:0으로 물리쳐 이름을 날리던 숭실학교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출신학교는 그랬지만, 평양팀의 멤버는 25세 이상의 청장년이었으며, 경성팀의 주축은 당시 민족 사학의 쌍벽을 이루던 연희와 보성 전문 선수로 대부분이 20~23세의 대학생이었다.

    제1회 대회는 10월 8일 서울 원서동 휘문고등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7천여 관중이 열광하는 가운데개최됐으며 1차전은 1:1로 비겼고, 9일의 2차전은 평양이 4:3, 10일의 3차전은 평양이 다시 4:2로 이겨 2승1무로 평양이 우승했으며 평양팀은 평양에 돌아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경평축구 참가 선수들
    <경평축구 참가 선수들>

    제2회 대회는 1930년 11월 28일부터 3일간 경성운동장에서 열렸다. 2회 대회는 다소 체계가 잡혔으며경성팀은 막강한 멤버를 갖출 수 있어 2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종합 2승 1패로 우승하며 지난 대회의 패배를 설욕하였다. 1차전은 경성이 3:2승, 2차전은 평양이 5:3승, 3차전은 경성이 5:1로 대승했다.

    그 후 1933년에 조선축구협회의 주선으로 경평 대표자들이 모임을 갖고 1933년 경성 축구단 및 평양축구단의 각각 창단을 기념하여 봄, 가을 두 차례로 나누어 경기 장소를 경성과 평양을 오가며 실시하도록 결정하였다. 1933년 제 3회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경기에는 약 2만명의 관중이 몰렸다. 그 후 경성-평양 대항 정기 축구전으로 경기가 계속되어 오다가 1935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경평전은 이른바 홈앤드 어웨이 방식(상대 지역으로 서로 찾아가서 경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경성, 평양 이외에 다른 도시 축구팀의 성장에 힘입어 3도시대항축구전이나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와 같은 도시대항 축구대회로 치러진다. 그러나 1942년 일제의 구기종목 금지로 인해 모든 대회는 중단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1946년 서울운동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평전이 열린다. 1942년 일제의 구기종목 금지 이후 4년 만에 열리는 대회였기에 서울 시민들의 큰 관심과 열광적인 응원 하에 열렸으며, 그 열기가 지나쳐 3월 26일 열린 2차전에서는 관중 난동이 벌어져 경찰이 공포탄을 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38선으로 남북통행이 금지되면서 평양 선수들은 경비망을 뚫고 어렵게 내려왔던 것이었으며, 돌아갈 때는 육로가 위험해 뱃길을 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서울 선수들을 초청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 채 경평전은 무기한 중단되었다.

    한편 평화협정운동본부는 72년 만에 열리는 경평축구대회의 국민응원단을 모집한다. 평화의 염원을 실어서 남북 모든 선수단에게 평화와 통일의 함성을 전하고자하는 이 번 참가 자격은 누구나 가능하다. 티켓 배부는 선착순으로 8월 6일 월요일 오전까지 평화협정운동 인천본부 담당자(인천본부 집행위원장 이용수 010-9757-9021)에게 문자로 연락하면 된다.(끝) 이문웅 기자

  • 글쓴날 : [18-08-06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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